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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문극겸 고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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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문극겸 고간원 약사

 

이 곳은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고려의 강직한 충신으로 유명한 문극겸 선조님이 잠들고 계신 곳이며 그의 충간(忠諫)을 기리고자 하는 곳이 고간원지(叩諫院址)가 있는 곳이다  

 

문극겸 선조님은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번 승딘하여 정언(正言)이 되었다, 당시 조정은 매우 어지러운 상태이어서 문극겸 선조님은 간관(諫官)들과 연명으로 상소하고자 하였으나 그 누구도 연서(連署)하려 아니히므로 문극겸 선조님 홀로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당시 임금인 의종(毅宗)은 문극겸 선조님의 충간(忠諫)을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외직(外職)인 황주판관으로 좌천시켰다가 얼마 되지 않아 간신들의 모함으로 면직시켰다,

 

문극겸 선조님의 충간(忠諫)을 듣지 않은 의종(毅宗)이 무신난으로 폐위되어 쫓겨 가면서“내가 일찍 문극겸의 말을 들었드라면  이와 같은 치욕 없었을 것” 이라며 일찍이 문극겸 선조님의 충간(忠諫)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또 국가의 조세를 탈취한 조원정(曺元正)을 탄핵하기 위하여 무려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결국 탄핵시키기도 한 인물로서 강직한 충간(忠諫)으로 고려를 바로잡고자 한 문극겸 선조님의 올곧은 정신을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분이다,

 

묘소의 주위에는 충남 지방문화재 제51호인 고간원지(叩諫院址)를 중심으로 재실(齋室)인 금강재(金剛齋), 충숙공(忠肅公) 영정을 모신 영당(靈堂)과 고간정사(叩諫精舍),신도비 등이 있다,

고간원등에 대한 기록은 1972년 임자보(壬子譜)에서도 나타난다, 처음에는 묘소로부터 오른쪽 약600~700m 떨어진 원당 모퉁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었으나  중간에 대홍수로 인하여 다 허물어진 것을 1914년에 묘소 아래인 현재의 고간원지(叩諫院址)로 옮겨 중건(重建)하였다,

 

신도비는 1853년 무렵에 세웠으며 비문(碑文)은 충청도 관찰사인 조득림(趙得林)이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 때 세운 신도비는 대 홍수 때 진흙 논 속에 묻혔으나 찾지 못하여 1924년 같은 위치에 현재 묘갈명(墓碣銘)으로 불리우는 신도비를 세웠으나 후손들의 염원으로 문종성씨를 중심으로 1977년 현재의 신도비를 세웠다,

신도비문의 작성자는 퇴계 이황의 14세 손 이가원(李家源)박사

 

위토(位土)확장에는  문중대 문성규씨가 최고 성의를 다하였으며 석물은 합천 판도판서 지례문중 29세 병완(炳琬),장흥(長興)의 두 문중이 헌납(獻納)하였다,

1984년 고간원지(叩諫院址)가 문회재로 등록됨을 기회로 고간원(叩諫院) 및 재실을 일신하기로 의결하여 지방비 보조와 많은 일가들의 도움으로 고간원지(叩諫院址) 중수(重修), 영당(靈堂) 및 고간정사(叩諫精舍)와 모선문 신축, 금강재(金剛齋) 중수(重修)가 있었다, 특히 문성규 위원장, 논산 문중대, 문승룡, 문종성의 도움이 컸다,

기타 모든 자세한 내용은 금강재(金剛齋) 중수기(重修記) 및 헌성록에 수록되어 전한다,

 

지방문화재 제51호는 고간원지(叩諫院址)로 한정되어 있었던 바, 문규환 위원장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2024년에는 문화재 지역을 충숙공(忠肅公) 묘역, 금강재(金剛齋), 영당(靈堂), 고간정사(叩諫精舍)등을 포함하여 전 지역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참고

利城宗中의 유래

삼한시대 마한에 속했던 고장으로 백제시대에 내리아현(乃利阿縣),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이성현(利城縣)으로 불리웠다,

중시조 익(翼)할아버지로부터 11世 孫이 되는 12世 찬(贊)할아버지를 입향조(入鄕祖)로 이루어진 門中으로 이성현(利城縣)이라는 地名을 기반으로 이성종중이라 칭하였다

 

지례문중 29세 병완(炳琬)의 이력

순평부원군파 판도판서공파 지례 동촌문중이며 생년월일은 高宗 癸巳 1893년생이며 卒年은 미상이며 忌日은 12월28일이고 繼代는 炳琬-鳳坤-鍾榮-度淵으로 계대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