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문다성(始祖 武成公 文多省 傳) |
남평문씨 시조 문다성(文多省)의 휘(諱)는 다성(多省)이시고 字는 명원(明遠)號는 삼광(三光) 이시며 시호(諡號)는 무성(武成)공입니다. 금자광록대부 중대광보국 상주국 동 평장사 고려개국 벽상공신 남평백으로 봉군되시고 식읍 3천호를 받으셨으며 98세에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1993년 탄강지인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의 문바위 옆에 설단하고 매년3월20일 단제를 모시며 장연서원에 배향하여 9월 中丁日에 유림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무성공 諱 多省 시조님의 묘소가 전하지 않으므로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의 문암(文巖) 옆에 설단을 하였고 매년 3월20일 전국의 일가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문바위(文巖)는 민속자료 32호로 시조단의 서쪽이며 문암각을 지어 문암을 보호하고 있는데 2004년 단청작업을 마쳤습니다.
장자못은 1970년경에도 고기가 많아 수렵도 하고 시조단의 앞으로 배가 다녔으나 토사가 쌓여 매립이 되어 주변은 논이 되었고 단소 입구까지 차량진입이 가능합니다. 장연서원은 직선거리로 300m 정도로 마주 보입니다.
[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된 남평문씨 시조 출생에 대한 전설은 472년(신라 자비왕 15년)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란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천길 높이의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어 기이하게 생각하며 군주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5세에 문사에 스스로 통달 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성을 문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 후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지고 98 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남평문공 다성 제단비명 |
1993년 季夏 문학박사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
운운(많고 많은)한 만성(萬姓) 중에 시조(始祖)가 없는 씨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씨족이 번영하고 가문이 훤혁(위엄이 밝게 빛남)하면 반드시 그 뿌리를 찾게 된다. 호남(湖南)의 남평문씨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다. 문씨는 고려 초에 이미 번영하였으며 병진 창보에 시조 무성공전(武成公傳)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읽으면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자못 양일(洋溢: 가득 차 넘침)하였다. 남평군 동녁에 한 대택(大澤;큰못)이 있고 못가에는 천길 높은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군주(郡主)가 그 바위 밑에서 놀제, 별안간 바위 위에 오운(五雲)이 찬란한 가운데에 어린 아기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군주는 이상히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살펴보았다. 석함(石函) 한 구를 발견하고 철색(철索)으로 달아내려 열어보았다. 그 속에 아기가 들어 있었는데 피부는 옥설(玉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겨우 5세에 문사(文思)가 영롱(玲瓏: 빛이 맑고 산뜻함)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났으며, 총명영오(聰明讀悟)하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므로, 이내 문(文)으로 성을 삼고 다성(多省)으로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를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문군(文君)은 일월(日月)같이 밝고 성신(星辰)처럼 맑다하여 호를 삼광(三光) 이라 하였다.
14세에 대사도(大司徒)에 오르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었고,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匿 輪國 上柱國平章事 三韓壁上功臣)으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과 태사태부(太師太侮)에 이르렀다. 수는 98세요, 무성(武成)이란 시호를 받았다.
부인은 김씨(金氏)요 아들 탁(倬)은 문하시중 무열공(門下待中 武烈公)이요 후손이 번영하여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경절공 익(翼)과 경정공 공유(公裕)와 충숙공 극겸(克謙)과 효혜공 유필(惟弼)과 충선공 익점(益漸)이 더욱 교연(翹然:여럿 중에 뛰어남)하였다
그 뒤에 사림(士林)과 후손이 남평사자봉 밑 지석강 위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축(尸祝)하였고 또 장자지(長者池)위에 문암각(文巖閣)을 세웠다. 공의 묘는 실전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제 남평문씨 대종회 시조 무성공 설단건립 추진위원회에서 문암각 좌편 간좌원(員坐原)에 제단을 모아 공의 향화(香火)를 받들기에 이르렀다.
또 이 궁비(穹碑: 묘앞의 비석)에 사실을 새겨 천추(千秋)에 전하려한다.
명 (銘)하되,
하늘로부터 큰 인재가 내려오시니 보통 사람은 판단할 수 없네.
오색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사자 봉우리 우뚝 솟아 있는데하늘로부터 떨어진 것 돌레 하나였네.
돌레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 어린 아기 우는 바로 그 소리였네,
아기가 자라고 또 영특함에 나라 위한 큰 일꾼이었네
벼슬은 공후(公候)의 지위에 오르고 시호는 무성공이요자손은 번창 하였네.
선비들이 높이 추앙하니 고요함이 있고 도량이 깊었네.
제사를 고이 드리오니 신령한 제단이 다시 우뚝하여라
옛적 법규에 의지하오니 일천년의 뒤 에는 영웅의 풍모가 생각될 진저
비명은 산문부분과 운문부분인 명으로 구분하여 작성하는데 명의 한자는 생략하고 번역내용만 적었으나 원본을 알고 싶으면 남평문씨 세덕록(대종회 발행) 참고하십시오.
2017년 3월 20일(월) 시조단제 모습
17년 3월 20일(월) 시조단제 모습
시조 유허비 - 지석강변
(문암각) 지방문화제 제 43호 문선명님이 2000년 11월 14일 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