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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평부원군

순평부원군

순평부원군 파보의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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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의종 때 지문하성사 집현전대학사(知門下省事集賢殿大學士)를 지낸 공유(公裕)의 손자로 그리고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를 지낸 극겸 (克謙)의 아들이다. 

벼슬에 나아간 시기와 방법은 확인되지 않으며 1216년(고종 3)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이미 재추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公은 순평부원군공파의 파조이시며 諱는 惟弼이시다, 

高麗 明宗 때 추밀원사 좌상기상시 어사대부(樞密院使 左散騎常侍 御史大夫)를 거쳐 高宗7년 안서부사(安西副使)가 되시어 고을을 다스려셨고 이듬해 수사공좌복사(修史公左僕射)를 거쳐 다음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셨으며 고종15년[1228년11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돌아가시니 왕이 조정사를 3일간 폐하고 슬퍼했는데 公의 춘추78歲이셨다.

 

대광보국(大匡輔國)숭록대부(崇祿大夫)상주국(上柱國)평장사(平章事)태자(太子)소사(少師)를 증직 하시고 순평부원군(順平府院君)에 봉하였으며 효혜(孝惠)란 시호를 받으셨습니다.

公께서 조석(曺石)의 란(亂) 때 왕을 모시고 물러나지를 않으니 왕이 말하길 빠른 바람이 불 때야 비로써 굳센 풀이 있다는데 바로 경(卿)을 두고 한 말이구나 했다고 합니다.

 

장연서원과 송호서원에서 제향을 드리며 순평부원군파의 파조로서 순평은 현재의 남평을 말하며 그 아래에 충익공파(達漢)와 판도판서공파(瑾)로 분파가 되어있습니다.

 

 

1. 氏族의 淵源

始祖는 문다성,字는 明遠,號는 三光이시다, 

壬戌譜 世籍편에 그는 新羅 자비왕 15년 미동부리현[남평의 옛이름]에서 태어나 三韓壁上功臣 南平佰 大河? 大元師 南平開國佰에 봉해졌고 武成이라 諡號를 받은 記錄이 東京史란 책에 실려 있는데 그 근거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壬戌譜 世祿편에는 始祖의 行蹟을 丙辰譜와 辛亥譜에 根據 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그 뒤의 系代가 확실치 않아 高麗 文宗조 尙書左僕射가 된 뒤 宣宗朝에 左承宣 겸 御使臺史, 肅宗때 門下省事로 西北面知兵馬事가 되셨고 강종(康宗)朝에 楓山君에 봉해졌고 敬節公이라 諡號를 받은 文 翼 조를 旣世祖로 世系를 잇고 있다.

楓山은 南平의 別號이며 南平을 貫鄕으로 삼는 연유는 始祖가 南平伯에 봉해진데 있다고 한다. 

文翼 역시 楓山君으로 봉해졌음으로 그가 中始祖로 대접받아 旣世祖가 된 것도 자연스럽다 하겠다.

 

2. 本貫地

현역 南平은 全南 羅州郡 南平面 一帶地名이다.

본래 百濟의 未冬夫里縣인데 新羅 景德王이 현웅으로 고쳐 茂朱 혹은 光州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高麗때 南平으로 바뀌어 羅州에 所屬시켰고 恭讓王때 和順監務로 삼았다, 朝鮮高宗32년에 郡으로 昇格되여 羅州부에 속했다가 1912年에 合倂되엿다.

 

3. 派譜의 略史

우리 文氏의 始祖는 위에 記述한 바 같으며 婦人은 新羅 王孫으로 金氏이고 號는 貞順神毅이라 하니 新羅 자비왕15년 壬子[서기472년]이며 지금으로 부터 약1500餘年이 된다.

이에 우리 族譜는 印出이 丙辰[英祖12年, 서기1736年]年이 創譜이나 시작은 明宗조로 가정연간(嘉靖年間)이라 하겠다.

 

이는 우리 順平府院君의 9世孫 간행통례원(簡行通禮院) 인의공(仁儀公)의 外孫子 海豊君 李魯[高品의 諱 垠의 外孫子]가 外家의 世系가 바로 되어있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겨 蒐集하고 矯正하며 30餘年만에 族譜의 基礎가 完成되여 印出 하려는 때에 壬?[임희]의 화를 당하여 燒失됨으로 이에 松岩 李魯의 유지를 이어 蒐集整理하여 陜川海印寺에 天地人3券으로 印出刊行于世하니 이것이 文氏族譜의 創始이다.

 

헌데 江城家의 主張인즉 辛亥보와 乙酉보의 兩族譜를 先譜라 이르나 家乘譜나 小派譜에 不可라하여 創譜일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이에 忠肅公 之子의 昆季之辨으로 說往說來하며 近300餘年 兩派 間是非不切이였으나 天佑自助하여 考證하나니 事必歸正의 大義가 確立됨에 고로 엄청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는 과정이 다음과 같으니 그 내용의 考證事를 紹介코저 한다.

 

3-1, 創譜의 內譯

多省--子 倬--子 翼---子 公仁

子 公裕--子 克謙[忠肅公] --子 惟哲[樞密院]

子 惟弼[順平府院君]

子 侯軾[閤門祗候]

子 公元---子 克純

 

3-2, 續修譜의 內譯

虛子層字 不記로 分派各書----侯軾

----惟弼

----惟哲

 

 

3-3, 矯正譜의 內譯

忠肅公 之----嗣 惟弼

----子 侯軾

----子 惟哲

 

創譜란 前 記述 한바와 같이 敬節公 諱 公裕의 子 忠肅公의 諱 克謙의 子 惟哲,惟弼,侯軾으로 編輯인출된 것인바 忠肅公 克謙의 死後274年 高麗史에 忠肅公은 明宗廟庭하고 子에 侯軾, 惟弼로만 記述 되였고 惟哲은 無諱이다.

이에 歷史와 私抄를 不敢下上하여 歷史를 무시 無子字하고 分派各書로 先書 閤門祗侯軾 次 順平府院君 惟弼하고 樞密院使 惟哲로 分派名書 한 것이 續修譜이다.

그러던 중 이번 順平府院君派 大同譜를 編輯함에 있어 考證資以(고증자이) 釐正譜[리정보]하니 여하 引用書籍 弘文館纂輯(홍문관찬집)중 選擧考篇을 보면 충숙공 지사 유필(忠肅公 之嗣 惟弼)이며 역이상(亦爲相)이란 구절이 있고 崔泫 文淸公의 보한집(補閑集)중에 壬申年 春考의 掌試官이 역시 忠肅公門下라 記述되었고 忠肅公之嗣 惟弼이며 亦是相이라 하였음.

 

 

            ◆참고◆ 

            崔滋을 紹介하면 1186년 明宗16년 丙午生이며 1260年 元宗5年 庚申年에 卒 하였다, 

            公은 高麗의 政治가요 初名은 宗裕,字는 樹德, 號는 東山이다, 諡號는 文淸, 本官은 海州이며 文憲公 중의 后이고 光宗시 文科及第하고 尙州의 司錄이 되고 李奎報의 推薦으로 文翰을 맡아 보았다.

 

이어 給田都監(급전도감) 錄事로 名聲이 있었고 1150年 高宗31年 使臣으로 蒙古에 다녀와 殿中少監寶文閣待制(전중소감보문각대제) 中書侍郞 平章事를 지냈고 詩文이 뛰어나 當代 文名을 떨쳐서며 學識과 行政力이 뛰어나 많은 治績을 쌓았으며 저서에는 家集10券과 補閑集3券이 있다.

 

고로 公은 우리文氏 順平府院君 諱 惟弼祖 보다 35世 年下요 아울려 이 補閑集은 高宗41年 甲寅1254年에 刊行된 古書로서 이 以上의 考證資料가 없음을 確認하고 이 忠肅實記를 믿고 따를 수밖에 없음을 滿天下 南平文氏에게 公開하는 바이며 順平府院君 諱 惟弼祖께서 卒年에 文淸公 崔滋은 43세였으며 이 이상의 考證資料는 없을 것으로 思料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