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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문극겸 고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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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문극겸 고간원 (忠肅公 文克謙 叩諫院)

 

 

소재지 - 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

문화재분류 - 충남지방 문화재 제51호

배 향 선 조 - 3세 충숙공 諱 극겸

제향일 - 충음력 10월 1일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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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휘 극겸 선조님 유적지입니다. 충숙공 묘소는 남평문씨의 현존하는 묘소 중 가장 오래된 묘소입니다.

충숙공께서는 중시조의 손자로 왕께 충간하다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던 중 유구에서 머무르시다 별세하신 이곳에 지었던 사당이 고간원입니다. 고간(叩諫-말을 끌어 당겨 멈추게 한다는 뜻) 공의 충간이 백의 숙제의 고간한 충절에 비유하여 고간원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 지방과 연고가 없었지만 여러 책에 문 선생의 머물렀던 곳으로 기록되었고 묘소도 있어 공께서 유구역 의시로 유명해지니 이 인연으로 역(驛; 말 관리와 방을 제공하는 국립여관)의 주변에 지형이 좋은 곳에 별장을 짓고 머무시며 청유(淸遊)를 즐겼을 것입니다. 

특히 마을 입구를 '원당모퉁이'라 부르고 근처의 논에서 기와의 파편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이곳은 흐르는 시냇물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산계정사(山溪精舍)의 멋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니 옛날 별장 터였던 곳을 공께서 돌아가시자, 당시의 풍속을 따라 영정을 모셔 원당(院堂)으로 삼았고, 후에 지금의 자리로 고간원을 옮긴 것으로 짐작됩니다.

고간원은 사당이요 영당입니다.

그러므로 공께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효(孝)를 실천하였고,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였으니, 고간원은 충효사상(忠孝思想)과 보국안민(輪國安民) 사상의 도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선생 약사(略史) 안내판

 

선생의 휘는 극겸(克謙)이요 자는 덕병(德柄)이니 고려 의종 17년(1122) 전라도 남평현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인 공유(公裕)인데, 시호는 경정공(敬靖公)이시다.

 

선생께서는 처음에 백부인 공인(公仁)의 음덕으로 산정도감(刪定都監) 판관(判官)이 되셨다. 이 때 세 번이나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관원으로서는 세 번 밖에 볼 수 없는 과거제도를 고쳐 다섯 번까지 허용하도록 왕에게 주청하여 조정의 의논이 그 의견을 좇아 통상적인 법도가 되었고, 선생 또한 37세 때 문과에 급제하셨다. 벼슬이 계속 승진하여좌정언(左正言)에오르자 합문(閤門)에 엎드려 조정의 내시와 점쟁이로 인한 정사의 폐해를 상소하였는데, 의종은 받아들이지 않아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되시었다.

 

선생이 황주에서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자자하자 왕의 측근들이 이를 시기하여 파 직시키라고 하였다. 다시 진주판관(晉州判官)으로 좌천시키려 했으나 강직한 신하를 지방관으로 연속 좌천시켜 언로(言路)를 막음은 옳지 않다는 간관(諫官)의 주청에 왕도 하는 수 없 이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제수하고 이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승진시켰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던 날 선생께서는 전중성(殿中省)에서 숙직을 하다 난군들에게 붙잡혔으나 평소 높은 명성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옥에 갇히셨다. 의종은 거제도로 쫓겨 가면서 선생의 말을 따르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한다.

 

명종이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의 벼슬을 새로 제수할 때 선생을 옥에서 석방하고 비목(批目)을 쓰게 하였다. 우승선 어사증승(御史中丞)에 제수되자 무신들도 자연 공을 의지하고 믿으며 옛적의 사실을 많이 물었다. 예부시랑(禮部侍郞) 지추밀원주사(知樞密院副使)에 임명되고 정3품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되셨지만 송유인(宋有仁)의 시기로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로 좌천되시었다.

 

사공 벼슬이 제수된 뒤부터 봉급을 받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의 청렴함을 탄복하고 칭송하였다. 송유인의 모함은 근신(近臣)으로서 왕의 거동에 호종하지 않았다함인데 선생께서는 모친 상중이어서 자식 된 도리를 우선으로 실천한 효자이셨다. 명종도 국법을 따른 것이라 문책을 망설였으나 선생께서 좌천되기를 자청하여 그대로 되시었다.

 

좌천되신지1년 만에 다시 태자소사(太子少師)로서 예전 벼슬로 복직하고, 오래지 않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시었다. 명종 13년(1183) 왕은 명인전에 장경도량을 베풀어 의식을 거행하고 절구시를 한 수 지어 선생께 하사함에 그 시에 차운하셨는데 군신간(君臣間)의 정의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판호부사(判戶部事)태자태보(太子太保)로승진하셨다.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을 때 추밀부사(樞密副使)조원정(曺元正)이 중서성의 공해전 전세(田稅)를 빼앗자, 선생은 그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는 소장을 무려 다섯 번이나 올려 조원정을 좌천에 이르게 하였다.

 

정중부의 난과 김보당의 난 이후 유풍(儒風)이 떨치지 못하여 당시의 교육과 문풍(文風)이 땅에 떨어지다시피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명유(名儒)로서 세 번이나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어진 선비를 뽑았고,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같은 문장가를 배출하는 등 문치(文治)를 부활시켰다.

 

당시 문관으로는 반차가 한문준(韓文俊)의 다음이 선생이요 최세보(崔世輔)가 그다음이었다. 반차를 최세보에게 양보하는 뜻을 왕에게 전하자 그 겸양을 아름답게 여긴 명종은 중서시랑 평장사 판예부사(判禮部事)를 겸해 아상(亞相)을 삼았다.

이어 명종 16년 중서(中書) 문하(門下) 두 성의 시랑평장사와 판병부사(判兵部事)가 되셨으며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의종실록을 편찬하셨다.

 

명종 17년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로 수상의 반열에 오르시고, 명종 19년(1189) 9월에 운명하시니 선생의 춘추 68세였다.

왕은 조정의 정사를 3일간 폐하고,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리셨다.

부인은 추밀원사(樞密院事) 이시민(李時敏)의 따님이고, 선생의 묘소는 충남 공주시 유구면 추계리 언덕에 모셔져 있으며, 명종 묘정(廟廷)에 배향되시었다.

매년 10월 초하루에 묘제를 지낸다.

 

 

고간원(叩諫院) 안내문▼

 

고간원은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 선생의 묘소가 있는 터에 지어진 원사(院祠)로서 영정을 봉안한 영당(影堂)이며, 정문의 이름은 망일(望日)이라 한다. 고간은 말고삐를 끌어 당기며 간하던(叩馬而諫)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충간(忠諫)에 견주어 유래된 이름이고, 망일은 임금을 향한 충성심이 빛난다는 뜻에서 취한 이름이다.

 

충숙공께서 백성을 돌보지 않는 의왕에게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불태우자 관복을 벗고 귀향 도중 유구역(維鳩驛) 벽에다 마음에 품은 충절의 시를 썼다. 뒤에 역을 수리할 때 그 내용이 화공에 의해 벽화로 그려지고, 그림을 본 여러 과객(過客)들이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차운시(次韻詩)가 뒤를 이어 유명해졌는데, 묘소로 인해 마을 이름도고간동(叩諫洞)이라불려졌다.

고간원은 조선 태종의 명으로 옛터에 세워졌으나, 임자년 홍수에 원사(院舍)가 허물어지고 원판(院板)이 표류하자 유구역 근처의 주민들이 제액(題額)을 인양하여 유구역에 두었다.

 

그 후 공주목사 곽간(郭趕)은 충간의 사실을 듣고 감탄하며 현판을 걸도록 하였는데 선조 23년(1590) 진사 이치림(李致霖)이 고간원기(叩諫院記)를 지었다.

임진왜란 중에 불타버리자 다시 건물을 짓고 광해군 9년(1617) 생원 최진명(崔振溟)이 고간원중수기(叩諫院重修記)를 지어 걸었다.

 

철종 2년(1851) 후손들이 현판을 수습하여 고간원을 중건하였고, 순종 1년(1907) 중수하던 중 자금이 모자라 1914년 2간(間)으로 줄여 공사를 완료하면서 현판을 교체하였다.

1989년 고간원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별사(別舍)로 충숙영당과 고간정사(叩諫精舍)를 금강재(金岡齋)뒤에다 신축하였다.

고간원지(叩諫院址)는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남평문씨 대종회 충숙공 유적보존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