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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원 (叩諫院) |
아래 사진은 2015년 11월12일 묘제 시의 고간원 모습입니다.
2015년 11월 묘제 모습
▶고간원 안내문
고간원은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 선생의 묘소가 있는 터에 지어진 원사(院祠)로서 영정을 봉안한 영당(影堂)이며, 정문의 이름은 망일(望日)이라 한다.
고간은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간하던(叩馬而諫)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충간(忠諫)에 견주어 유래된 이름이고, 망일은 임금을 향한 충성심이 빛난다는 뜻에서 취한 이름이다.충숙공께서 백성을 돌보지 않는 의왕에게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불태우자, 관복을 벗고 귀향 도중 유구역(維鳩驛) 벽에다 마음에 품은 충절의 시를 썼다.
뒤에 역을 수리할 때 그 내용이 화공에 의해 벽화로 그려지고, 그림을 본 여러 과객(過客)들이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차운시(次韻詩)가 뒤를 이어 유명해졌는데, 묘소로 인해 마을 이름도 고간동(叩諫洞)이라 불려졌다.
고간원은 조선 태종의 명으로 옛터에 세워졌으나, 임자년 홍수에 원사(院舍)가 허물어지고 원판(院板)이 표류하자 유구역 근처의 주민들이 제액(題額)을 인양하여 유구역에 두었다.
그 후 공주목사 곽간(郭趕)은 충간의 사실을 듣고 감탄하며 현판을 걸도록 하였는데, 선조 23년(1590) 진사 이치림(李致霖)이 고간원기(叩諫院記)를 지었다.
임진왜란 중에 불타버리자 다시 건물을 짓고 광해군 9년(1617) 생원 최진명(崔振溟)이 고간원중수기(叩諫院重修記)를 지어 걸었다.철종 2년(1851) 후손들이 현판을 수습하여 고간원을 중건하였고, 순종 1년(1907) 중수하던 중 자금이 모자라 1914년 2간(間)으로 줄여 공사를 완료하면서 현판을 교체하였다.
1989년 고간원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별사(別舍)로 충숙영당과 고간정사(叩諫精舍)를 금강재(金岡齋) 뒤에다 신축하였다. 고간원지(叩諫院址)는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남평문씨 충숙공유적보존위원회
▶충숙공 신도비 병서
丁巳(1977년)歲暮 문학박사 眞城 李 家 源 謹撰
가원이 일찍이 고려사를 읽다가 문충숙공의 사적에 이르러 무릎을 치며 여러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이 젊었을 때에 날카로운 의기로 권세부리는 간악한 무리 베기를 청하고 궁중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규탄함으로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떨치었고, 면직되어 서울을 떠나매 청고한 명망이 더욱 높아져서 영특한 풍모와 굳센 결의는 천추에 빛나게 되었다.
공의 묘소는 공주 추동 금계산 갑좌에 모시었는데 예전에 전해오던 신도비가 어느 시대엔가 없어졌음으로 이제 그 후손들이 다시 세우려 종성과 종대가 협력하고 일이 이루어지매 원모와 제훈이 공의 실기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이 비명을 청하였다.공의 휘는 극겸이오 자는 덕병이오 남평문씨니, 시조는 신라 태사 무성공 다성이요, 고려에 들어와 좌복야 경절공 익이 조부이시며, 아버지 공유는 지문하성사 집현전대학사이며 시호는 정경이시다.
어머니는 장단 한씨로서 평장사 문렬공 안인의 따님이시다.공은 예종 17년(1122)에 전남 나주군 남평면에서 탄생하셨으며 백부 공인의 공으로 산정도감판관의 직을 얻었다. 당시 제도에 평민으로서는 열 번이라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으나 부조의 공으로 음직에 있는 사람은 세 번 이상 응시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공은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그 제도의 타당치 못함을 개탄하고 다섯 번까지 응시하게 해 줄 것을 청원하여 조정의 의견이 이를 따랐다. 그 후 공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학업을 멈추지 아니하여 의종 1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좌정언에 이르렀으며,
의종 17년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환관 백선연이 권세를 함부로 부리어 궁인 무비와 추한 행위를 하고 있으며 점술인 영의는 요사한 술법으로 임금께 사랑을 받고 백순관 북쪽에 두 궁을 두고 재화를 사축하여 복을 빌고 제를 올리는 비용으로 쓰고 있으면서 백선연과 함께 그 일을 하고 있사오며, 양계의 병마사와 오도의 안찰사가 임금께 하직할 제 반드시 술자리를 차려 각기 방물을 바치게 해서 그 실적의 상하를 매기고 심지어 재화를 추렴하여 백성의 원망을 일으키며,
지추밀사 최부이는 요직을 맡아 조정 안팎으로 세도를 부리어 탐욕이 한없고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는 자는 중상을 일삼아 재물을 모아 쌓음이 많사옵니다. 청컨대 백선연과 무비를 베고 영의를 몰아내어 목축하는 사람으로 충당케 하고 최부이를 파직시켜 온 나라에 알리소서”하고 궁중의 일까지 언급하매 왕이 크게 노하여 그 소를 불태워 버렸으며 최부이가 궁실로 들어가 변명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공을 불러 대질을 시키매 공이 지극히 적절했으나 마침내 황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처음에 공이 그 소장을 초 잡을 때에 간의대부 이지심과 금사중 박욱화와 기거주 윤인첩 등은 상소문에 서명함을 회피하더니 공이 좌천되어도 그들은 태연자약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같은 동료 영걸들은 어이 그리 뻔뻔한가”라는 시구를 읊어 풍자하였다.
공이 황주에 있을 때에 아전과 백성들이 흠모하고 선정으로써 명성이 자자했으나 다시 중상을 입어 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담당관이 아뢰기를 “극겸은 곧은 신하인데 오랫동안 지방에 두어 올바른 언론의 길을 막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의종 24년에 합문지후를 제수 받고 진중내급사로 옮기었다.
그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매 공은 마침 성중에 숙직하다가 이를 피하려 했으나 뒤쫓아 온 병사에게 잡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전에 정언이었던 문극겸이다.
임금께서 만약 내 말을 따르셨다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르렀겠느냐. 원컨대 그 칼로 나를 죽이라”고 하였다. 그 병사가 이상히 여기고 공을 잡아 여러 부장 앞에 이르니 무장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름은 평소에 들은바 있으니 죽이지 말고 가두라”고 하였다. 의종이 남쪽으로 가는 길에 말 위에서 한탄하기를 “내 일찍 문극겸의 말을 따랐던들 어찌 이런 욕을 당했겠느냐”고 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관직을 주매 공을 석방하여 비목(批目)을 쓰게 했으며 이의방의 건의로 공에게 우승선 어사중승을 제수하매 이공승 같은 문신들이 이에 힘입어 화를 면했고 무신도 역시 공을 존경하여 옛일을 많이 자문했다. 그리고 이어 용호대장군을 겸임하였고 재상이 된 후에도 여전히 상장군을 겸임하였다.
공의 딸이 이의방의 동생 이인의 처가 되었음으로 계사년의 난에 온가족이 화를 면하였다.
명종 원년에 좌간의 김신윤 등은 공이 승선으로써 대성의 벼슬을 겸하여 부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상소하였고 또 간관들이 간청하므로 공이 대부 소경으로 옮기었다.
어느 날 근신들이 왕의 장수를 비는 술자리를 베풀어 밤이 깊도록 파하지 않고 점점 시끄러워지자 공이 간하기를 “이런 일은 선왕이 폐위당한 원인이라”고 말하고 왕을 권하여 안으로 들게 하였다.
명종 3년에 예부시랑으로 옮겼다가 추밀원지주사가 되었으며 지원사로 승진되었으나 송유인과 틈이 있어 수 사공좌복야로 좌천되었다. 사공에 임명된 후로 봉급을 받지 않으시니 세상에서 그 청렴함을 칭송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해를 넘기고 기복되어 전직에 복귀되었다가 후에 참지정사가 되고 중서시랑평장사 판호부사 태자태부로 오르셨다. 그때 동짓달에 거행해오던 팔관회가 태후의 제삿날과 상치됨으로 10월로 앞당기자는 예관의 건의가 있자 왕이 재상부에 문의하매 공이 변경할 수 없음을 역설하여 종전대로 확정되었다. 명종 15년에 판 예부사가 되었을 때 문관으로서는 한문춘이 석차가 둘째이고 다음이 공이었으며 그 다음이 최보세였다.
한문춘이 가장 윗자리에 재상으로 판 이부사가 되매 공은 당연히 다음 자리에 재상이 되어야 함에도 그 자리를 최세보에게 양보하니 당시 아는 이들이 그 도량을 찬양했다. 이듬해에 중서문하 두성의 판 병부사를 겸하고 그 다음해에 권판상서이부사에 오르셨다.그 후 명종 19년(1188) 9월 병인일에 68세로 돌아가시니 왕이 3일간 조회를 보지 않고 충숙의 시호를 내렸다.
부인은 이씨니 추밀원사 시민의 따님이시다. 3남3녀를 두었으니 아들로 후식은 증 평장사이고 유필은 평장사이며 유철은 추밀원사이다. 사위로 임부는 태상경이오 차거수는 태복시사이며 이인은 내시부집주관이다. 신종 5년에 명종묘에 배향되었으며 후에 고간원을 사액하고 송호 저산 장연의 여러 서원에 모셨다.
銘하였으되 저 공주의 산하를 돌아보니 상서로운 기운이 울울히 서린 묘소가 있네
깊고 깊이 옥을 묻었으니 고려대의 꽃봉오리로다
그 벼슬은 判吏部 위계가 드높구나
그 시호는 忠肅이라 나라로부터 애도와 영광을 갖춰 받았네
처음에는 음보(蔭補)로 나가서 청운의 길 바야흐로 형통하니
남삼(藍衫)입은 신분도 다섯 번 응시케 하자고 나라의 규례를 고쳐 놓았네
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언론의 직에서 굳센 절의를 지켰네
소인들 무리가 일어나 형벌주고 복주는 왕의 권능을 멋대로 행사할 때
용기 있고 강직한 공의 언론 구름을 헤치고 울려 퍼지다
黃州判官으로서나 晉州判官으로서나 선정의 소리 무성했네
鄭仲夫 비록 사나웠으나 차마 공을 더 이상 해치지 못했네
말위에서 외로이 탄식하며 왕은 마침내 남쪽으로 귀양하고
새왕의 첫 정사에 결재의 조목 써서 도우니
문신은 편안하게 되고 무신은 공에 의지하고 조정의 옛일도 공에게 자문했네
왕이 주연에 빠지매 간절히 화복의 기틀 아뢰었고
司空으로 좌천되자 청렴히 그 녹을 받지 않았네
10월의 入闕의식은 옛 전통 등진 무례 함이니 잘못 이로다
근거한바 옳고 곧음이 남들의 흠모하는바 되었네
흰 머리를 둘이서 애달파하여 임금이 지은 시에 신하는 화답하였네
둘다 쇠하고 시들어 시의 가락 몹시도 구슬프구나
돌아와 이 땅에 몸 붙인지 아득한 800년자손들은 면면히 뻗어있고 묘소의 나무들도 무성하구나
이 높직한 빗돌에 새기니 나의 말 감개롭다
뉘 감히 존경하지 않으리오 고려왕조의 어진 이 재상을
* 신도비(神道碑)란 나라에 크게 공헌하며 거룩하게 산 사람의 일생 동안의 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해 세우는 비(碑)이다.
* 병서(竝序,幷序)란 서문(序文)을 아울렀다는 의미로 묘비(墓碑)에서는 짧고 간결한 시구로 써 놓은 명(銘)이 본문인데, 명문(銘文)에 앞서 고인의 삶의 과정과 그렇게 산 삶의 과정을 찬양, 명문을 썼다는 긴 서문(序文)이 있으면 묘비명의 主를 구분하는데 혼란스럽게 되어 명(銘)을 바르게 구별하기 위하여 병서(幷序)를 주제(主題) 끝에 반드시 붙여놓게 된다.
▶고간원(叩諫院) 상량문
정미 8월이십육일 후손 감찰 학술 근식섬뜰을 치며 간쟁함은 당현의 높은 덕망 특별히 청직하였고 원을 의론하여 이름 붙임은 송상의 장려가 가장 현저하다.
실로 그 선임이 중함에 이름을 이처럼 부름이라 택리를 표하여 충성을 세움은 우럴어보니 전대에 이같았고 철문 두드리며 잘못을 지적함 또한 선철로부터 구해 들음이라. 결연한 충성보임에 교서에 인하여 특별히 간관을 제수하고 운감이 빛에 젖어 다시 훌륭히 세움에 붉은 괴리가 정직함 더욱 덜어나더라.
이미 전왕이 정표의 의 다루었으니 하물며 후손들 추원하는 생각 간정치 않으랴.성하도다.
우리 충숙선조는 고려조의 명경이요 세상에 특별히 강직한 분이라 대궐에 들어 유궐을 보함에 어찌 명정의 비난꺼리며 어전에서 시비를 다춤에 아침햇살에 우는 봉일 뿐 아니라 일시의 권신들이 모두 량간을 펼치메 두려움 품고 백세의 사표들 이에 방정한 덕 추중하네. 어찌하여 길더듬는 장님이 경계함 알렸는고. 이로부터 벼슬길에 풍파가 많았네 청포로 합문에 복청하는 대열에 서니 의에 가히 둘 수 없고 마침내 백의로 물러나는 날에 인하여 지명이 되었네.
이에 산소드린 곳을 계산 남쪽 줄기요 이에 사셨던 곳은 웅천 서쪽 고을이라 이워로가 빛을 다툼에 정려각이 빛나고 풍우가 지나갓으나 열루의 도화 완연하네. 역대의 현철들 읊으며 탄식하였고 읍지에 실려있는 문헌을 징험하였더라.
진실로 만세 신명이 보호하였으나 난리를 겪은 나머지 지금까지 미치지 못했으니 우리 대에 와서 기수의 패하고 흥함 있으나 개연히 생각함에 집 지을 책임이 우리 후인에 있음이라. 이에 사우 하나를 세운 것이 재실까 몇마장 가까운 거리라. 영호남의 종족들이 모여 의론을 함께하고 산중의 선비들이 점괘가 더욱 좋다하네.주춧돌 옛터에 의연히 남았으니 새로 놓지 않아도 볼 만하고 곧은 기둥 선산에 소나무로 하니 예비하는데 걱정없구나.
부지런히 다듬고 흙 바름은 실로 자손들 정성 다함에 있었고 먹줄을 잡아 규격 맞추니 또한 목공의 정교함 보겠더라. 물이 때를 따라 만남있음에 액호 붙임 다시 회복되고 공정이 속히 이루어짐에 동우 이워짐 기대하더라.
새가 날아가듯 하은 옛날 광휘를 더하였고 점잖은 분들 모였으니 완연히 당시의 풍범이었더라.
공손히 짧은 노래 부르며 상량 올림 도우노라.
어영차 동을 보니 아침해가 빛을내며 동에서 또오르는 구나. 한조각 공심이 해바라기처럼 기울었으니 열광이 지금 해동에 전하더라.
어영차 서를 보니 부춘산 높이 서쪽에 대하였구나.
엄자능이 한나라 벼슬 받지 않았으니 청표가 기리 호수에 이웃하였더라.
어영차 남을 보니 옛적에 공이 말타고 남으로 향함 생각나니 박공이 그림 그리고 중이 창화하였으니 정채가 역 남쪽에 함께 전해오네.
어영차 북을 보니 큰 서울 북쪽 하늘아래 아득히 멀구나. 유상이 밝고 밝은 별 같으니 오르내리며 잊지 못하고 북쪽을 공음하네.
어영차 상을 보니 쉬지 않고 돌아가 저하늘 위에 있구나. 오연에 날이 기울어 다시 밝음에 높은 공훈 삼한벽상공신이더라.
어영차 하를 보니 후손들 번청하여 뜰아래 나열했구나. 제향 올리며 때로 담모함에 빛나는 선령께서 아래를 굽어보시네.엎드려 원하옵건데 상량한 후에 헌함이 무성한 송죽과 더불어 더욱 공고하고 택지가 천지와 더불어 기리 보존되며 충효의 문호에 옹장함에 오직 조심스럽게 하고 영신이 높이 계시어 엄히 보호하며 성하고 창대하여 쇠퇴함 없이 억만 자손들 공경히 받들고 사랑으로 친애하여 기리 만년토록 하늘의 도우심 받게 하소서.
▶고간원(叩諫院) 중건기(重建記)
선조23년(1590) 3월 일 진사(進士) 이치림(李致霖)지음고려의 정언(正言) 벼슬하던 문극겸(文克謙)이 왕에게 충간(忠諫) 드린 일로 쫓겨나 백의필마(白衣匹馬)로 이 역을 지나다가, 시를 지어 벽에다 썼었다.
마침 역의 다락집을 중수하면서 단청을 한 박(朴)씨는 화상을 그려 벽화로 삼았는데 사람들은 그 그림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 몰랐었다.
후에 무의자(無衣子)라는 이가 있어, 도를 닦는 사람 천여명을 거느리고 서원(西原)을 향해 가다가 이 역에 당도해서 자게 되었다. 그는 그 그림을 보고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이 그림은 왕에게 충간을 직무로 하는 신하가 조정을 떠나는 그림이다"라 하고는 한 절구시(絶句詩)를 썼다.
그 후에 두 객이 그 시의 운(韻)을 따라서 시를 지어 썼는데 역시 성명을 쓰지 않았던 바, 추측건대 그들은 세상에서 숨어 산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 일은 고려사(高麗史)에 자세히 실려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기록되었다.본 역의 옛 자취는 문헌이 증명해 주어, 오늘에 이르는 천년 뒤까지 그 풍채를 사모하여 우러러봄에, 위엄이 있어 가히 범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에 관계되는 것을 대략 모아서 취하고 그 시들을 아울러 써 가지고 삼가 고을 수령인 곽 영감(郭令監)에게 고하였다. 영감 곽한(郭維)은 이것을 명이 긴 가래나무에 새겨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군자에 이른 서기(庶幾:현인, 어진사람)를 바라보는 것은 풍운(風雲:풍모, 영웅호걸의 출세)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않으리오
금강재(金岡齊) 기(記)
금강재
병자 계월망 후 3일 후손 진사(進士) 양 현 지음
공주는 즉 호서의 큰 도시이다. 북으로 서울을 접하고 서로는 바다를 통하여 명승으로 일컬으니 사대부들의 루각과 원림이 더러 그 간에 있음을 보겠다. 내가 전일 과거 보러가며 매양 이곳을 지나면서 그 지령과 일걸의 웅장함과 빼어남을 감상하며 탄미하였다. 그러나 이는 심상이 보고 지나는데 불과 하였으니 어찌 족히 이르리오.
이제 이 재실 창건을 선조 산소 아래 지어서 배회하며 둘러보니 송백과 칡넝쿨이 완연히 옛처럼 울창하고 또한 비 후면에 실적을 기록하여 신필의 유적이 아직까지 새로운지라 이 재실에 오름에 살마으로 무릇 열기 있는자 그 물을 보면 자연히 그 선세를 생각하고 그 선세를 생각하면 추원하는 감회가 유연히 마음속에 스스로 일어날 것이니
어찌 기리 잊지 못할 마음이 없겠는가?슬프다.
선조 충숙공은 이 고려조의 명재상이라 의종의 혼란한 때를 당하여 충직한 정론으로 말을 잡고 간언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옛적의 백이숙제에 비유하였다.
이러므로 당시에 용납되지 못하고 시 한수를 지어 그 뜻을 보였으니 시에 가로대주운이 난간을 부숨은 칭예를 구함이 아니오 원앙이 수례를 막음이 어찌 자신을 위함이리오.한조각 충성심을 상감이 알아 안주니 구태어 여윈 말 몰아 물러감 주저하네 하였다.
마침내 주자의 소림에 은둔한 괘를 얻어서 이 고을에 물러나와 임시로 살다가 세상 떠났다.그후 8,9백년을 지나는 동안 난리를 많이 겪어 묘소를 잃어 버렸으니 팔도에 널리 흩어져 있는 우리 후손들의 마음 항상 개탄스럽드니 근년에 이르러 천지 신령의 도움으로 꺼꾸러진 비석이 마멸지 않고 묘역에서 나와 이미 소상히 상고하여 신빙할 수 있고 또한 읍주지 기록을 살펴봄에 살으셨던 고을과 재소 드린곳이 차례로 실려있으니 이 금란의 한 줄기가 험준하여 석자 봉분이 옛모습으로 전해오니 오르 내리는 선조의 영령이 필연히 즐거워 하시리라.
이에 을해 10월 보름에 원근의 후예들이 시향드리러 운집하여 재물 모음을 상의하여 급히 공사를 시작하였으니 재호는 모두가 금강재로 함이 마땅하다 하는고로 중론을 쫓아 액호하고 회중으로부터 나한테 기문을 청하니 가만히 생각해 봄에 그 책임을 사양할 수 없는 고로 삼가 전후사를 이상과 같이 펴노니 후일 보는자 또한 느껴보면 앙모하는 성심이 반드시 그 오래 될수록 더욱 돈독하리라.
금강재(金岡齊) 기(記)
충숙공 휘 극겸 선조의 묘제가 2021년 11월 5일(금) (영당제는 11월 4일)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고간원에서 있었습니다.
이날 묘제는 코로나19로 인해 전국의 일가들이 참여하지 못하고가까운 지역 일가 들이 참여하여 간소하게 지냈습니다.
아헌관 명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