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 시조 단(始祖 壇) |
소재지 -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
구 분 - 민속자료 32호
설 명 - 남평문씨 시조의 묘소가 전하지 않아 탄강지인 문바위 옆에 단을 만들고 해마다 양력 3월20일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모시는 제단(祭壇)입니다.
인근에 문바위와 문암각, 장자지(長者池), 장연서원(長淵書院), 시조유허비(遺墟碑)가 있습니다.
시조 제단비 명 |
문학박사(文學博士)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 1993년 季夏
남평문씨 시조단
남평문씨 시조 무성공 제단비
운운(많은 모양)한 만성(萬姓) 중에 시조(始祖)가 없는 씨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씨족이 번영하고 가문이 훤혁(糶赫: 위엄이 밝게 빛남)하면 반드시 그 뿌리를 찾게 된다.
저 호남(湖南)의 남평문씨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다. 문씨는 고려 초에 이미 번영하였으나 조선 영조(英祖) 신해(辛亥1732년)에 이르러 처음 보(修譜;족보를 만듬)하였고, 그 벽두에 그의 시조 무성공전(武成公傳)이 실려 있었다. 그 내 용을 읽으면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자못 양일(洋溢: 가득 차 넘침)하였다.
남평군 동녁에 한 대택(大澤;큰못)이 있고 못가에는 천길 높은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군주(郡主)가 그 바위 밑에서 놀 제, 별안간 바위 위에 오운(五雲)이 찬란한 가운데에 어린 아기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군주는 이상히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살펴보았다.
석함(石函) 한 구를 발견하고 철색(철索)으로 달아내려 열어보았다.
그 속에 아기가 들어 있었는데 피부는 옥설(玉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겨우 5세에 문사(文思)가 영롱(玲瓏: 빛이 맑고 산뜻함)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났으며 총명영오(聰明영悟)하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므로 이에 문(文)으로 성을 삼고 다성(多省)으로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를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문군(文君)은 일월(日月)같이 밝고 별처럼 맑다하여 호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14세에 대사도(大司徒)에 오르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었고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 삼한벽상공신(三重大광輔輪國 上柱國平章事 三韓壁上功臣)으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과 태사태부(太師太侮)에 이르렀다.
수는 98세요, 무성(武成)이란 시호를 받았다.
부인은 김씨(金氏)요 아들 탁(卓)은 문하시중 무열공(門下待中 武烈公)이요 후손이 번영하여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경절공 익(翼)과 경정공 공유(公裕)와 충숙공 극겸(克謙)과 효혜공 유필(惟弼)과 충선공 익점(益漸)이 더욱 교연(翹然:여럿 중에 뛰어남)하였다
그 뒤에 사림(士林)과 후손이 남평 사자봉밑 지석강위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축(尸祝)하였고 또 장자지(長者池) 위에 문암각(文巖閣)을 세웠다. 공의 묘는 실전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제 남평문씨 대종회 시조 무성공 설단건립 추진위원회에서 문암각 좌편 간좌원(艮坐原)에 제단을 모아 공의 향화(香火)를 받들기에 이르렀다
또 이 궁비(穹碑:묘앞의 비석)에 사실을 새겨 천추(千秋)에 전하려 한다.
명(銘)하되,
하늘로부터 큰 인재가 내려오시니 보통 사람은 판단할 수 없네.
오색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사자 봉우리 우뚝 솟아 있는데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 돌레 하나였네.
돌레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 어린아기 우는 바로 그 소리였네,
아기가 자라고 또 영특함에 나라 위한 큰 일꾼이었네
벼슬은 공후(公候)의 지위에 오르고 시호는 무성공이요
자손은 번창하였네. 선비들이 높이 추앙하니 고요함이 있고 도량이 깊었네.
제사를 고이 드리오니 신령한 제단이 다시 우뚝하여라
옛적 법규에 의지하오니 일천년의 뒤 에는 영웅의 풍모가 생각될 진 저
▶비명은 산문부분과 운문부분인 명으로 구분하여 작성하는데 명의 한자는 생략하고 번역내용만 적었으나 원본을 알고 싶으면 남평문씨 세덕록(대종회 발행)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