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조 문익 (中始祖 文翼) |
중시조(中始祖)란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을 말합니다,
시조 이후 가문을 중흥시킨 조상을 자손들이 추존하여 중시조로 모시는데 이러한 경우 온 종중의 공론에 따라 추존하게 됩니다,
병진보는 사실상 남평문씨족보 초간본이라 할 수 있는 신해보(辛亥譜, 1731), 을묘보(乙卯譜, 1735)에 후속하는데 전해져 왔던 자료들에 근거해서 6개도에 산거하는 제 파계(派系)를 광범위하게 수렴하면서 시조에서 중시조까지는 해석상 모순이 있어 병진보에서 경절공 문익(敬節公 文翼)을 중시조로 모시고 1世로 하였고 이후 최초의 합의된 대동보에서도 중시조를 1世로하여 세계를 정리하였으며 최신의 대동보도 이를 따르고 있다.
중시조의 휘(諱)는 익(翼)이시고 시호(諡號)는 경절공(敬節公)이시다.
성품이 곧아 왕께도 직간을 서슴치 않았고, 국교가 불교인 상황에서도 유교의 정대한 진리 를 깨닫고 실천하여 기대와 촉망을 받았다
고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해 헌종1년(1095) 근신으로 보제사 상량준비문 받음,숙종3년(1098) 찬선대부, 급사중(종4품)을 거치시고 1099년 3월(숙종4년) 요나라에 원자 책봉 임무를 마치고 좌복야 승진하시다.
1102년 직문하성사로 서북면 병마사를 하시고 1103년(숙종8년) 우산기상시(정삼품)로 승진하고 예종 3년(1108) 병부시랑지어사대사 충상장군 병부상사 1112(예종7년) 참지정사 (종2품)로 누진하셨다.
강종 때 평장사 상주국 영동정의 추증과 풍산군으로 봉함, 남평문씨를 고려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중흥조로 네 분 아드님(공인, 공원, 가관, 공유)도 모두 뛰어나시었다.
남평문씨 세덕록의 기록 |
公의 휘(諱)는 익(翼)이요 남평현 사람이다.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무인년 3월 문명이 높아 세자시강원 좌찬선대부를 제수 받고 이어 급사중이 되었다.
이듬해 가을에는 고주 겸 밀진사로서 원자 책봉을 청하러 요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임오년에는 직문하성 서북면병마사가 되었고 계미년 6월에는 우산기상시가 되시었다.
시조 무성공 이후 공에 이르기까지 누대를 실전하여 계대를 잇지 못하고 있음은 공구(恐懼;무섭고 두려움)할 일이로다.
예전에 창간보를 편수한 선인들이 公을 남평문씨 일세조로 기록하였는데 털끝만치라도 사실을 매우 조심스럽게 여긴 까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