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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유허비

남평문씨 시조 유허비(遺墟碑)

 

소재지 - 전남 나주시 남평읍에서 차량 3분 정도 거리인 들들강(지석강) 강변 도로 옆

 

유허비(遺墟碑)란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하는데 남평문씨 시조 유허비(遺墟碑)는 시조 무성공(다성)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남평에서 능주로 가는 도로변 지석강(砥石江-드들강)변에 석굴형(石窟形)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원래 있던 장소가 침수가 잦아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도로의 확장과 포장으로 인하여 현재는 도로 옆에 붙어 있는 형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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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은 본래 백제 말엽에 동부리(冬夫里) 현이라 하였다. 

신라 때에 현웅(玄雄)이라하고 무주현의 관할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이 되었다.

혹은 永平이라 하였으니 나주에 귀속시켜 감무(監務)를 두었고 또한 화순 감무와 겸해 왔더니 조선때에 현감으로 고쳤다.

현의 동쪽 8里 지점에 장자지가 있고 못 위에 우뚝한 바위가 있는데 옛적 신라 때에 왕이 서기를 바라보고 기이한 징조라 하여 시신(侍臣)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라 하였는데 하루는 홀연 자기(紫氣)가 암상(岩上)에 모여 있고 아이 우는 소리가 나거늘 마음에 이상히 여겨 시자로 하여금 보게하니 석함(石函) 중에 어린 아이가 있으되 살결이 눈같이 희고 눈동자가 둘이오 용(龍)의 코라 품고 와서 길렀는데 때는 宋明帝 泰豫 원년이오 신라 자비왕 15년 壬子(서기 472년)였다.

 

석함위에 붉은 글씨로 쓴 文字가 있었는 고(故)로 文氏로 성을 내리고 名은 다성(多省)이라 하고 字를 명원(明遠)이라 하였으니 공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문사(文思)를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났으며 文이 넓고 理를 달통하여사람들이 일컬어 왈 文君은 밝기가 해와 달(日月)같고 맑기가 별(星辰)같다하여 號를 三光이라 하였다.

나이 14세에 대사도(大司道)가 되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고 삼중대광보국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匿輔國 三韓壁上功臣)이 추증되어 남평개국백 태사태부(太師太傅)를 봉하였으니 수향이 98세요(혹은 107세라 함) 시호를 무성이라 하였다.

자손들이 번창하여 신라 고려 간에 절의와 문학이 함께 나서 12대 평장사(平章事)와 백(伯)을 봉하고 시(諡)를 내린 이 있으니, 그 중에 현저한 이로는 휘 극겸 시호 충숙공은 추밀원 지진사(樞密院 知秦事)로 직간을 하다가 물러났으니 사적이 고려사 및 공주 유구驛에 실려 있고, 휘 달한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왜적을 크게 물리쳐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순평군을 봉하였으니 사적이 고려사에 실려 있고, 휘 익점은 도학이 높고 충효가 지극하였으며 겸하여 목면의 옷을 입게 한 은택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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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 초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서 이름이 72현비(賢碑)에 함께하고 호를 삼우당이라 하였으며 강성군에 부민후를 봉한 사적이 국사와 私家문안에 실려 있다.

이후로 세덕이 계속 이어 졌으나 누차 병화를 겪어서 유허의 기적(記蹟)을 오래도록 계술(繼述)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일척(一尺)의 표석(表石)을 문암 앞 지강(砥江) 남편 노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수리(數里) 지점에 세우게 되었으니 길가는 사람들이 탄식하는 일은 면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