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전체메뉴 열기 모바일메뉴 열기
모바일 메뉴 닫기

파조 문유필 설단 및 구현조 재단

남평문씨 구현조 제단비(南平文氏 九顯祖 祭壇碑)


証.允實.仁渭. 球. 祿千. 璟.達漢.繼宗.孝宗.南平文公 九顯祖라 함은 高麗 忠烈王朝에서 朝鮮 太祖까지 約 二百年에 걸처 出仕하여 高卿節臣으로 顯達하신 五世 諱 証 六世 諱 允實 六世 諱 仁渭 七世 諱 球 七世 諱 祿千 八世 諱 璟 九世 諱 達漢 十世 諱 繼宗 十世 諱 孝宗公을 尊奉함이며

 

pajo01.jpg

 

五世 諱 証의 先系는 武成公 諱 多省은 始祖이고 一世祖 敬節公 諱 翼은 高祖요 二世祖 敬靖公 諱 公裕는 曾祖이며 三世祖 忠肅公 諱 克謙은 祖考이고 先考 諱 惟弼은 參知政事 判禮部事 順平府院君 諡 孝惠이며 妣는 光州蔡氏 平章事 順禧의 女이고 公은 學問講磨에 精心코 孝悌가 至極 하였으며 忠烈王 十六年 王이 元에 入朝 不在 時 哈丹賊이 侵入한다는訛言으로 民心이 動搖되자

耆老宰相들이 江華島遷都를 決議했지만,開京死守의 忠節을 지켜 匡靖大夫檢校樞密院社를 除授받고 諡는 貞敏이며 夫人은 國大夫人平康蔡氏 都僉議中贊 人揆(인규)의 女이고 膝下에 長子 允實 次子 仁渭 三子 殊인데 仁殊는 無後하다.

 

pajo02.jpg

 

六世 諱 允實은 先考 諱 証의 長子요 生卒年代는 未詳이나 宦蹟은 貞順大夫兵部令에 올라 早承家業 했지만 悲運으로 二四歲에 早逝하여 天運을 避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軍器監 李淳益의 女사이에 承仕郞司醞署直長을 지낸 獨南 球가 忠節로 이어온 家門의 榮譽와 孝悌를 實行 하셨고 六世 諱 仁渭는 先考 証의 次子이고 高麗 二六代 忠宣王朝에 奉順大夫大府少卿上將軍 工部尙書를 歷任하고 忠肅王 때 匡靖大夫右僕射로 相在職 時 王이 元나라 濮國長(복국장)公主와 結婚 後 三年만에 疑問死하매 元으로부터 孃疑(양의)를 받고 放蕩(방탕)으로 國庫를 蕩盡(탕진)하자 宗廟社稷을 保存토록 懇曲히 諫 하였고얼마 後 一三二一年에 下世 하시니 膝下에 諱 復卿은 大府卿이고 無後하니 嗣子는 諱 祿千이며 七世 諱 球는 考 諱 允實의 獨男으로 幼年에 先考와 死別하고 總敏(총민)過人하여 奇愛를 늘 받았고 片母 李氏夫人께 恒常 남을 恭敬하여 德을 쌓아 王께 忠誠하고弱者와貧者는 救恤(구휼)하는 牧民官이 되라고嚴한 敎育을 받았고,出仕해서는 承仕郞直長으로 司醞署(사온서)에서 모든 業務를 光明正大히 處決하고 片母에게 孟宗之孝를 本받고 思慕하기를 羹墻之慕(경장지모)로 敬慕하였으니 孝子라고 稱頌(칭송)이 藉藉(자자)했으며 膝下에 獨南 璟으로 家門을 承系하였고

 

pajo03.jpg

 

七世 奉翊大夫典理判書 諱 祿千은 先考 諱 仁渭의 嗣子로 好學 寬厚(관후)하여 子息 訓育 時 高卿節臣(고경절신)의 名門後裔 답게 處身하고 入身 揚名하여 以顯父母孝之終也라고 하였고 膝下에 瑾은 奉翊大夫判圖判書요禑王 十四年에 療東征伐軍 李成桂가 威化島에서 回軍하여 禑王 과 崔瑩을 斬殺(참살)하는 政變의 昏迷(혼미)함을 槪嘆(개탄)코 滅門之禍를 當할 危機에 官職을 辭任하고 先考의 遺訓에 따라 長子 世鳳次子 世麟과 함께 陜川大冶村(합천대야촌)에 隱居 判圖判書公派의 入鄕祖 이시며

 

pajo04.jpg

 

八世 諱 璟은 先考 諱 球의 獨男으로 忠孝思相과 器局(기국)이 尨大(방대)하고 義俠心이 强하고 大府卿 在職 時 恭愍王 八年 奇轍(기철)이 非理를 姿行하여 不軌를 圖謀하는 瞬間 洪彦博(홍언박)이 奇轍을 誅殺(주살)할 때 官軍에게 兵仗器等을 迅速히 支援 周到綿密한 狀況處理로 二等으로 錄券(록권)되여 端城(단성) 義勇輔理功臣號를 받고 三重大匡門下贊成事에 除拜된 後 南平 府院君에 封爵되고 夫人은 文化柳氏 侍郞塘 의女이며, 南平國大夫人의 封號를 받고 膝下에 獨男 達漢이 있고

 

pajo05.jpg

 

九世 諱 達漢의 先考는 諱가 璟이요 妣는 文化柳氏 侍郞塘의 女이며 一三三七년에 出生(출생)하여 禑王(우왕) 六年에 上護軍(상호군)에 除授되고 同王 9년에 門下評理에 오르고 陽廣 慶尙 都體察使로 任命되여 公州에서 倭賊8명 木川에서 20名을 斬(참)한 戰功으로 追誠翊祚功臣號를 받고 同王 一四年에 門下評理에 除授되고 推忠翊戴輔祚功臣號(추충익대보조공신호)를 받고 贊成事에 올랐으며 恭讓王 四年에 順平君에 封爵되고一三九二년 六月 一六日 五六歲로 下世하니 諡를 忠翊으로 내리고 長端(장단) 禹觀里臨津江 北十里에 初葬 後에 失傳하고 夫人은固城 李氏 吏部尙書 嶠(교)의 女이며 膝下에 長男 繼宗과 次男 孝宗이 있으며

 

pajo06.jpg

 

十世 繼宗은 先考 諱 達漢의 長男으로 天資仁厚하고 才智 兼備하여 開國元宗功臣으로一四一八年領議政 柳廷顯 左議政 朴訔(박은) 右議政 韓尙敬 等 많은 臣僚들과 世子 讓寧大君을 廢하고 忠寧大君을 王世子로 擇賢을 主張 하였고 同年 形曺判書 와 漢城府尹을 歷任하고 翌年 4月仁壽府尹을 거처 廣州牧使를 除授 받은 後 一四三七年 八月 二五日 下世하니 坡州 交河面 法興里 松峴 茁奉下 壬坐原에 雙墳 有碣이나 失傳하고 貞夫人은 江陵金氏 判司 寶의 女이고 子는 通善郞司憲府持平諱 承祚이며

 

pajo07.jpg

 

十世 諱 孝宗은 先考 達漢의 次男으로 一三六五年 出生하고 禑王때 蔭補로 武官에 補任되고 江原道僉節制使(첨절제사)와 同知總制를 歷任하고 一四二一年 母親喪으로 辭職 月餘만에 左軍總制로 起復하고 四年 後 明 宣宗의 賀登極使(하등극사)로 左議政 李原이 副使로 다녀왔으며 그 二年 後 左右軍都總制에 이어 知中樞院事(지중추원사)를 歷任하고 1440年에判中樞院事에 올라 致仕하려니 几杖(궤장)을 받고 1444年 六月 享年 八十에 考終하니 朝會를 二日간 撤會하고 官廳에서 葬禮할 때 世宗이 祭文을 지어 下賜하고 諡를“胡簡”(호간)이라 내리고 貞夫人은 樂安金氏로 父는 監司 瀰(이)이고 長子는 行虎翼侍衛佐領副護軍(행호익시위좌영부호군) 佐翼一等功臣 永安君 諱 致이고, 次子는 大護君 諱 敏이고 三子는 通政大夫 羅州牧使 諱 敘(서)다.

 

pajo08.jpg

 

이른바 九顯祖 行蹟이 歷史에 赫赫한데 後孫들의 不敏의 所致로 追慕享禮도 行하지 못한 점 이 어찌 痛嘆하지 아니리오/이에 많은 宗人과 門中의 發議로 協贊과 精誠을 모우고 特히 炳昌宗人은 本 文案을 基礎하고 淺學非才(천학비재)한 不肖가 先代階下 統合碑에 略記하여 永世不忘코저 함이로다,

 

西紀 二千一四年 三月旁裔(방예) 炳昌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