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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서원 |
배향인물 : 문다성 |
문공유 |
문극겸 |
문유필 |
문익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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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서원 |
배향인물 : 문극겸 |
문유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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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산서원 |
배향인물 : 문극겸 |
문달한 |
문익점 |
문찬 |
유지강 |
유지기 |
장연서원(長淵書院) (배향인물:문다성,문공유,문극겸,문유필,문익점) |
소 재 지 :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읍 풍림리 720
배 향 인 물 : 문다성(文多省) 문공유(文公裕) 문극겸(文克謙) 문유필(文惟弼) 문익점(文益漸)
창 건 연 도 : 1734년(영조 10)
향 사 일 : (음)9월 중정
▶연 혁
장연서원은 남평의 대표적 성씨인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시조인 무성공 문다성(武成公 文多省)을 비롯함 문공유, 문극겸, 문유필, 문익점 등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이 서원 건립의 유서가 마련된 것은 1734년(영조10)세워졌던 장연사(長淵祠)로 부터이다. 이곳 장연서원이 자리한 풍림리는 장자지(長者池)가 있던 곳으로 시조인 문다성의 탄강설화가 구전되는 곳이다. 구전의 내용은 기록상 근거가 불분명하나 그 구전 시기는 매우 빠르다
이 장연서원의 창건에 대해 문중사람들은 1734년(영조10)이라 말하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즉 ≪장연서원지≫내용 가운데 <영묘 49년 임진사실추록>조에 의하면 그 사실이 쉽게 확인된다. 1772년(영조 48)에 장흥, 능주, 영암, 보성, 광주 등 남평문씨 후손들이 순찰사(巡察使)에게 올린 상서에는 문다성을 건사치제(建祠致祭)함이 후손들의 당연한 도리이나 뜻만 있지 실행에 옮기지 못한지 오래임이 토로되어 있다. 또한 이보다 앞선 1770년(영조46)에 만들어진 성균관의 통문과 관의 제사(題辭)에도 그 아쉬움이천명되어 있고 각 읍의 자손들이 남평 운흥사에 모여 건사의 통문을 올린 것도 이때였다.
결국 1772년(영조 48)에 올린 상서에 대해 순찰사는 협조와 지원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사우는 1772년 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세기 후반 경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71년(고종 8)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된 뒤 1923년부터 전반적으로 다시 세워지기 시작하여 규모를 일신하였고 1975년 대대적인 중개수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다성(多省)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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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문다성(多省) |
세(世) |
출 생 일 : |
사 망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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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생 지 : 전남 나주 |
파(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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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물 분 류 : 선 조 |
父이 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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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인 : 대 종 회 |
등 록 일 : 2016-08-14 |
▶경력/공적사항
남평문씨 시조,시호: 무성공(武成公), 諱: 다성(多省), 字: 명원(明遠), 號 : 삼광(三光)금자광록대부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동 평장사 고려개국 벽상공신 남평백으로 봉군되시고 식읍 3천호를 받으시고 98세에 별세하심.탄강지인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의 문바위 옆에 1993년 단을 만들었으며매년 3월20일 전국 일가들이 단제를 모시고 있으며 장연서원에 배향하였음.
▶남평문공 다성 제단비명
1993년 季夏 문학박사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운운(많고 많은)한 만성(萬姓) 중에 시조(始祖)가 없는 씨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씨족이 번영하고 가문이 훤혁(위엄이 밝게빛남)하면 반드시 그 뿌리를 찾게 된다.저 호남(湖南)의 남평문씨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다. 문씨는 고려초에 이미 번영하였으나 조선 영조(英祖) 신해(辛亥1732년)에 이르러 처음 수보(修譜; 족보를 만듬)하였고, 그 벽두에 그의 시조 무성공전(武成公傳)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읽으면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자못 양일(洋溢: 가득차 넘침)하였다. 남평군 동녁에 한 대택(大澤;큰못)이 있고 못가에는 천길 높은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군주(郡主)가 그 바위 밑에서 놀제, 별안간 바위 위에 오운(五雲)이 찬란한 가운데에 어린아기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군주는 이상히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살펴보았다. 석함(石函) 한 구를 발견하고 철색(철索)으로 달아내려 열어보았다.
그 속에 아기가 들어 있었는데 피부는 옥설(玉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겨우 5세에 문사(文思)가 영롱(玲瓏: 빛이 맑고 산뜻함)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났으며, 총명영오(聰明讀悟)하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므로, 이내 문(文)으로 성을 삼고 다성(多省)으로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를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문군(文君)은 일월(日月)같이 밝고 성신(星辰)처럼 맑다하여 호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14세에 대사도(大司徒)에 오르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대將軍)이 되었고,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匿 輪國 上柱國平章事 三韓壁上功臣)으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 과태사태부(太師太侮)에 이르렀다. 수는 98세요, 무성(武成)이란 시호를받았다.부인은 김씨(金氏)요 아들 탁(卓)은 문하시중 무열공(門下待中 武烈公)이요 후손이 번영하여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경절공 익(翼)과 경정공 공유(公裕)와 충숙공 극겸(克謙)과 효혜공 유필(惟弼)과 충선공 익점(益漸)이 더욱 교연(翹然 : 여럿중에 뛰어남)하였다.
그 뒤에 사림(士林)과 후손이 남평 사자봉밑 지석강위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축(尸祝)하였고 또 장자지(長者池) 위에 문암각(文巖閣)을 세웠다. 공의 묘는 실전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제 남평문씨 대종회 시조 무성공 설단건립 추진위원회에서 문암각 좌편 간좌원(員坐原)에 제단을 모아 공의 향화(香火)를 받들기에 이르렀다 또 이 궁비(穹碑: 묘앞의 비석)에 사실을 새겨 천추(千秋)에 전하려 한다. 명(銘)하되, 하늘로부터 큰 인재가 내려오시니 보통 사람은 판단할 수 없네. 오색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사자 봉우리 우뚝 솟아 있는데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 돌레 하나였네. 돌레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 어린아기 우는 바로 그 소리였네, 아기가 자라고 또 영특함에 나라 위한 큰 일꾼이었네 벼슬은 공후(公候)의 지위에 오르고 시호는 무성공이요 자손은 번창하였네 선비들이 높이 추앙하니 고요함이 있고 도량이 깊었네 제사를 고이 드리오니 신령한 제단이 다시 우뚝하여라 옛적 법규에 의지하오니 일천년의 뒤 에는 영웅의 풍모가 생각될 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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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다성은 신라 제20대 왕인 자비 마립간 때의 인물로,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인 남평현 출신이었다.
신라 지증왕과 진흥왕, 진지왕 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지내고 남평문씨의 시조가 되었다. 갓난아기 때 남평현의 장자못이라는 연못가의 높은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있으며장자못가에 문암(文巖)이라는 전설 속의 바위가 남아 있다.